Saturday, March 19, 2016

# 중국의 드라마 후, 거상(巨商)드라마 温州一家人(Legend of Entrepreneurship, 온주 일가)


원쩌우일가 드라마는 총 36부작으로 중국의 CCTV에서 2012년 방영되었고 책으로도 출판되었다.
타이완 출신의 배우 李立群(극중아버지, 周万顺, 쩌우 완순 역활), 딸역활 殷桃 (극중이름 周阿雨 쩌우 아 위), 아들역활을 한 张译(극중 이름 周麦狗 마이 거우), 엄마 역활 迟蓬(극중이름 赵银花,잉화)



1. 원쩌우(온주)상인은 왜 유명한가, 
중국 동남쪽 상하이 밑에 위치한 ZheJiang(浙江省, 절강성) WenZhou시(温州,온주시)는 약 980만명의 인구가 살고있으며 그들중 약 280만명은 해외각지에 거주하며, 거상으로 유명하다. 이 지역은 중국내에서도 장사꾼들로 명성이 자자하며, 이들 출신은 실제로 중국과 개방개혁이후 세계 각지에 퍼져서 장사를 하며 거상으로 명성을 떨치고 있다. 그 주역인 한 원쩌우 가족의 성공과정을 그린 드라마 이다. 


*원쩌우시(붉은색표시)

2. 드라마 줄거리, 

80년대 초를 배경으로 원쩌우의 한 산골시골마을의 4가족이 고향을 떠나서 각각 중국내 그리고 유럽에서 성장하며 성공을 하게 되는 이야기 이다.  



원쩌우 고향집을 팔고 고향을 떠날때, 딸은 당시 13세로 이탈리아로 떠나게된다. 그리고 아들과 아버지 엄마는 원쩌우 시내로 나와 처음에는 고물을주워 생활하며, 아버지는 구두를 팔다가 구두공장을 차려 사업에 성공하고, 엄마는 단추를 유통하여 큰돈을 벌게되고, 아들은 동북지방으로 이동하여 안경회사를 차리게 된다. 


누구보다도 고생을 한, 딸(아메이)는 이탈리아에 도착하여 학교를 다니게 되지만 얼마되지 않아 수업료문제로 학교에서 나오게 되고 입국때 도움을준 현지인(식당운영)의 배려로 식당에서 일하며 다시 공부하게 되고, 성장하여 프랑스로 옮겨 대학을 다니며 공부하지만 삶이 순탄치 않다. 
원쩌우출신의 장사꾼 기질을 발휘하여 그녀는 온갖역경을 헤치고 나간다. 같은 동향사람과 결혼하게 되지만 꿈의 시간도 잠시 다시역경에 휘말리고, 결국 다시 혼자가되어 친구와 함께 그의 제2의 고향인 이탈리아 플라토로 돌아와 의류사업에 뛰어든다. 



현재 많은 중국의류 기업들이 진출해 있는 플라토(Plato)지역은 피렌체 위에 위치한 지역으로 원쩌우 출신의 상인들과 현지의 상인들의 대립이 심했다. 그 역경을 넘어서고 당당히 성공하게 된다. 

한편 아버지는 구두사업보다 한층더 돈을 벌수 있는 유정사업에 뛰어든다. 유정사업에 들어가는 자금이 만만치 않고 번번히 실패를 거듭하게 되며, 결국 아들에게 돈을 빌리게 되는데 아버지의 실수로 아들의 공장에 화재가 나고 아들의 삶은 180도로 변하게 된다. 
결국 아버지가 벌려논 유정사업장소인 Shanbei(陕北지방)으로 오게 되지만 일은 잘 풀리지 않고, 어머니도 지쳐 이혼까지 하게 되며 떠나게 되고, 아들은 그 지역 촌장의 딸과 석연치 않은 결혼까지 하게 된다. 


어머니는 다시 원쩌우로 돌아와 단추장사를 시작하게 되고, 사업동반자의 도움으로 잃었던 옛집까지 찾게 되고, 동반자의 청혼을 받아들여 옛집에서 살게 되지만 얼마되지 않아 아버지가 찾아오게 되고 아버지는 상황을 판단하고 말없이 다시 유정사업을 벌였던 섬북의 허허벌판으로 돌아간다. 그리고 그는 자금부족으로 멈추게 된 유정사업을 팔려고 광고를 내게 되고, 힘든 삶을 살게 된다. 
그 사이 아들의 며느리는 손자를 데리고 그를 방문하게된다. 아들도 결국 부상의 몸을 입고 부인의 곁으로 돌아오게된다. 


그러던 어느날 아버지 앞에 엄마가 큰 돈가방을 들고 나타난다. 그 돈은 유럽에 있는 딸이보내온 돈이였다. 그리고 부부는 다시 합쳐 살게되고 멈췄던 유정도 다시 재개하고 결국 석유가 나오게 되며 아버지는 큰돈을 벌게 된다. 


그리고 20년이 지난 시간 다시 아버지는 고향땅에 큰집을 짓게 되고, 유럽에서 딸 가족이 돌아오게 된다. 딸은 그를 끝까지 좋아해준 프랑스출신 변호사와 결혼하게 되고 딸을 얻었다. 


13세의 어린 나이에 쫒겨나듯 중국을 떠나며 그녀는 아버지를 원망했었다. 그런 아버지와의 재회는 그렇게 20년만에이뤄졌다. 아버지는 직접 얼굴을 못보고 주방에서 멈칫하는 사이 딸이 아버지에게 다가가 안는다. 
이로써 부녀지간이 화해하며 드라마는 끝이 난다. 


3. 왜 봐야 하는가, 
지금 이 드라마는 한국 케이블방송(OBS)에서 방영중이다. 하지만 심야시간대에 방송하고 어느정도 인지도가 있는지는 모르겠다. 과거를 돌아보며 추억을 회상하게 만드는 드라마는 우리나라에도 이미 몇편 있었다, 서울의 달이 그랬고 최근에 방영된 응답하라1988도 그중 하나가 아닐까 싶다. 
일본에도 드라마는 아니지만 영화로 상영된 三丁目の夕日(산쵸메의 석양)이 이와 비슷하지 안을까 싶다. 
하지만, 이 드라마는 우리가 지금껏 몰랐던 중국의 전통상인들의 정신과 그들의 삶을 통해 그들의 상업마인드를 볼수 있는 기회가 아닌가 싶다. 덤으로 중국 개혁개방 30년의 근대사의 일대기를 함께 볼수 있어 역사 공부도 함께 할수 있다고 생각한다. 

* 사용된 모든 이미지의 저작권은 해당 저작권자에 있음. 


Friday, March 11, 2016

#311東北大震災の痕-終わらない放射能問題、3월11일 동일본대지진의 잊혀지지 않는 기억들.


もう5年前のことになっている。3.11震災は私にとっても非常に衝撃だった記憶に頭に残っている。記憶の中で忘れにくい一つの出来事ではないかと思う。その記憶がなくなる前に書いておきたい。

2011年3月11日(金曜日)午後1時頃

日暮里駅発の成田空港行きの高速電車に乗り込んだ。車窓から見えてくる青空が非常に印象的だった。今日使う航空便は普段使っていない、チャイナエアーラインだった。
14時20分頃、CI101便午後16時半発、台北行きを乗るため、第二ターミナルに下りて、カウンターへ着。
14時35分頃、キャリアを預けることを言われたが、何と無く機内持ち込みにすることにした。
14時40分頃、普段直ぐ出国場に進めて行くが、その日は4階にある、レストラン街に上がり、うどんを注文した。
14時46分頃、注文を終わり、呼び出し機を貰いテーブルに座るところ、足のかかと部分よりジーンとした感じがし、瞬間その空間にいる人々と目があった。それから数秒たったない瞬間、カタカタ大きな音を初め、人々の叫びが聞こえた。私も慌てながら身をテーブルの下に隠した。暫く、カタカタ音が続いた。テーブル下には何時入ったか分らないうちに3,4人の人が一緒にいた。一人の女性は携帯で何処かに電話をかけている様子だった。
14時55分頃、音が止まり、揺れも落ち着く気がした。その際、放送じゃない、大きな肉声で”外に出てください”と声が聞こえた。人々は全力で外(3階バス、車が止まる高架路)へ走った。
身を起きてキャリアをもって私もその場を逃げて外に出た。揺れの影響だったのか、床には天井の破片が散らばれて、天井のスプリングクーラーは水を散らしていた。半袖姿の店の従業員たちはその際も人々を案内していた。

벌써 5년이란 시간이 흘렀다. 2011년 3월11일 금요일 오후2시46분, 동일본 지역에 일어난 진도8이상의 강진으로 일어난 그 시간을 떠올리며, 그 기억이 사라지기 전에 이글을 남기고자 한다.  

3월11일 금요일 오후 1시경,
 나는 타이페이 출장관계로 나리타공항으로 이동하기 위하여 도쿄 닛뽀리역에서 고속열차 스카이라인에  올랐다.  그날은 아무것도 못먹은 상태로 이동길에 올랐다. 공항까지 한시간안에 도착하므로 공항에서 간단히 식사를 할 생각이였다. 그날따라 차창밖으로 보이는 하늘이 너무도 파랬다. 
14시20분경,  나리타공항 2터미널에 하차하여, 차이나에어 체크인카운터에 도착했다. 
14시35분경,  평소와 달리 수화물 위탁의뢰를 하지 않은채 수속을 마쳤다.  
14시40분경,  츨국장을 바로 벗어나지 않고, 4층의 식당가로 에스컬레이터로 이동했다.  오른쪽에 우동을 파는 가게로 이동하여, 우동을 주문했다.  

엄청난 흔들림. 

14시46분경, 우동주문을 마치고, 호출기를 들고 테이블에 짐을 푸는 순간, 발뒤꿈치에 전기가 흐르는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리고 몇초뒤, 이제껏 경험못한 엄청난 흔들림이 왔다.   천정의 철골이 흔들이는 소리가 마치 금방이라도 내려앉을들한 기세다.  너나 할것 없이 재빨리 테이블 밑으로 몸을 숨겼다.  테이블 밑에는 이미 3,4명이 있었으며, 한 여성은 전화로 열심히 지진상황을 어디론가 리포트 하고 있었다. 
14시55분경,  엄청안 흔들림은 잠시 소강상태가 되었다.  어디서인가 큰소리로 바깥으로 건물밖으로 나가라는 함성이 들렸다.  나도 케리어를 들고 밖으로 이동하려고 움직였다.  4층 식당가의 천정에서는 스프링쿨러가 터져서 물날리가 나고 있었다. (아래 사진)



15時05分頃、大勢の人々が一瞬3階の建物入り口である、高架部分で待機していた。その際、大きな余震が来た。止まっていたリムジンバースが左右に大きく揺れ始まった。高架橋もまるで飴みたいに揺れ始めた。バスは倒れそうな角度まで揺れたが、幸い倒れはしてなかった。二回目の恐怖の瞬間だった。
15時15分頃、警察など係り員は人々を下にある駐車場に移動させた。行列は末が見えないほど長かった。駐車場までは無事に大きな揺れはなかった。地面に立っているだけで、恐怖感は緩やかになっていた。
15時40分頃、駐車場は一瞬避難場所になって、入国したばかりの人々と混ぜることになった。
ヨーロッパなどから着く便が多いのか、ヨーロッパから東京に旅行に来た人々が多かった。中には新婚旅行でフランスから来たカップルもあった。その人々の顔には言うまでもなく不安そのものだった。
16時頃、空模様が変わってきた。暗くなる空と共に風もあり、肌寒く感じる天気だった。JALの職員たちに見られる人々は毛布を配っていた。数の限りがあるため、先ず老若者へ配るとの話をかけながら配っていたが、その際、中国から来た若者群(約6,7人)は列に割り込み毛布を受け取った。言葉が知らない様子ではない雰囲気だったが、取りあえず自分らの分を確保したいような勢いだった。
16時半頃、外にいたせいなのか、大きな余震はあまり感じてなかった。ただ、そこからは、生理的な苦痛がきた。そう考えたら、その日、まだ一食も食べてない、水もまともに飲んでない。それから、トイレに行きたい。駐車場の墨には簡易トイレが設置された。しかし、蛇列だ。荷物もあり、そこに並びに行くのも大変だ。
17時頃、雨がぽちぽち降り始めた。警察と関係者は車を移動しながら、案内放送を日本語と英語でしていた。今、庁舎1階の安全確認を行っている最中で、安全が確保出来次第そちらに案内する放送だった。暫く待つしかなかった。
17時半頃、列が動き始めた。一旦1階に移動することになった。一階に入り、椅子のところにかけた。外より風もないので良かったが、それも一瞬、建物の中からの余震は外より音もあり、もっと不安な感じがした。
18時頃、空港閉鎖の案内と共に詳しい出発予想時間は其々の航空会社へ訪ねる放送案内が流れた。共に、500mmのペットボトル水が配られた。共にRitzクラッカーのビスケットも配られた。その際、その中国人群はまた、人とは違う行動をした。人々は個々一個ずつとっているのに彼らは大量に取っていた。色んな人種が集まっている中、目立つ行動は言葉知らない人でも皆嫌だっと思った。

일단 바깥으로 대피

15시05분경, 많은 사람들이 순간 3층 출국장 입구가 있는,  고가 도로 부분으로 이동했다. 그리고 잠시뒤 또다시 엄청난 여진이 왔다.  정차해있던 리무진 버스가 좌우로 아주 심하게 흔들렸따. 마치 거인 걸리버가 장난이라도 하듯이... 그때 찍어놨던 동영상이 전부 소실이 되어서 아쉽다.  다행히 버스는 넘어지지는 않았지만, 사람들은 아비규환 그 자체였다. 
15시15분경, 여진이 소강상태에 이르자, 경찰은 사람들을 1층 주차장으로 유도하기 시작했다. 마치 피난민행렬과도 같이 사람들은 끝없이 줄지어 이동했다.  일단 지면으로 이동해서인지, 아까와 같은 공포감은 사라진듯 했다.
15시40분경, 출국장에서 이동해온 사람들이 모이고, 잠시뒤 입국장에서도 막 입국수속을 마친듯한 사람들과 직원들이 주차장으로 몰려 나왔다.  입국장에서 온 사람들중에는 외국인이 대부분이며, 아마 유럽쪽에서 비행편이 도착했는지 유럽에서 온 듯한 인파가 많았다.  행렬중에는 신혼여행왔다는 프랑스 커플도 있었다. 정말이지 잊을수 없는 허니문이 아닐까 싶다.  말도 안통하는 이곳에서 이런 난리를 만났으니 얼마나 불안할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16시경, 하늘이 점점 어둡게 변하고 있었다.  아직은 초봄이라 햇살없는 날씨에 바람은 많이 차가웠다. JAL 직원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기내용 모포를 가지고 나눠주기 시작했다.  넉넉치 않는 숫자이기에 나눠주며 안내방송을 한다.  노약자에게 양보를 부탁한다는 내용이다.  그때 어디선가 대여섯명의 중국인 젊은 그룹이 나타나 모포를 수령하기 시작한다. 영어를 못알아들은것 같기도 하고 우선 그들은 본인 확보에 나섰다. 
16시30분경,  외부에 있어서인지 그뒤 큰 여진은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마신것도 없는데 생리적인 현상이 왔다. 임시 화장실이 주차장 주변에 설치가 되어있지만, 엄두가 나지 않는 상태이다. 긴 줄이 뱀꼬리처럼 늘어져 있었다. 짐을 맡길수도 없는 상태라 그냥 참고 있을수 밖에 없었다. 
17시경, 갑자기 어두운 하늘에서 빗방울이 하나둘씩 떨어지기 시작했다. 경찰차는 차를 이동하면서 영어 일어로 안내방송을 했다.  지금 청사 1층의 안전점검중이므로, 안전이 확인되면 이동을 하라는 내용이였다. 

다시 실내로 이동

17시30분경,  사람들이 움직이기 시작앴다. 일단 1층 입국장으로 이동하는것 같았다. 1층으로 들어오니 아무래도 바깥보다는 따듯하고 조금은 편안한 느낌이였으나, 그것도 잠시, 실내에서느끼는 여진은 역시,  정말로 싫었다. 몸은 편해도 마음은 더 불안해 진것 같다. 
18시경, 공항폐쇄의 안내방송과 함께 오늘 출발은 없다는 방송이 나온다. 그리고 자세한 내용은 각각의 항공사에 문의하라는 내용이다. 그리고 500ml 생수를 나눠주기 시작했다.  생수와 함께 비스켓도 함께 나눠주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때 아까 그 중국인들이 또다시 다른 행동을 하기 시작한다. 순서대로 각자 1개(아래 사진)씩만 뽑고 있는데 그들은 박스째 취한다.  여러 나라 사람들이 모여있고, 심지어 이런 힘든 상황에서 본인들만 생각하는 행동을보고 언어는 안통하지만 다들 어이 없는 표정들을 지었다. 



18時半頃、室内にあるテレビを見た。津波のニュースばかりだった。その際、初めて分った。津波が大変だったことを、それから、今回の地震がどれほど大きかったのかを知るようになった。
携帯の電波はもう死んでしるし、空港は閉鎖状態、どうしたら良いのか、すべてが暗くなる一方だった。
19時頃、隣に私の年齢に見える男性がいた。彼は香港から出張で着て、帰国する際だった。日本語は喋れなかった。私も一人だったので、その際、一人よりは友たちを作ることの方がいいと思い、その人と色んな話をした。先ず、彼の飛行運行状況を確認するため、臨時カウンターへ足を運んだ。それから、私も運行会社へ尋ねにいた。彼らは運行中止になったことしか話してなかった。明日、滑走路の安全が確認し、空港が再開するのであれば、運行する可能性は高いとの追加情報ももらった。
20時頃、今晩ここに泊まるしかないことが分ったので、無料で配る寝袋を受け取って、丁度開放した、3階に移ることにした。お店のシャッターは下りていて、店の前に寝袋を開いた。香港から来た彼と一緒だった。周りには日本人は殆どいなかった。
20時半頃、彼と先ず食料を確保するため、別行動をした。私は地下の店に足を運んだ。そこには既に食品になりそうなものはなくなってしまった。残っているのは野菜などがあった。それから、アルコールが必要だったけど、ビールなども全部売り切りだ。丁度、サワーが残っていたのでないよりはいいと思い買った。
21時頃、2,30分起きで余震は続いた。余震が来る度、音は物凄く感じた。シャッタの揺れ音と天井の揺れは最初恐怖だったが、どんどん鈍くなっていた。香港からきた彼と3階に戻り、収穫物を集め、ゆっくり食べ始めた。お酒が入ると少し気が緩くなってきた。彼はエンジニアで筑波にある日立へ出張にきたそうだ。初めての日本じゃかったけど、今回みたいに地震にあったのは初めみたいだ。
22時頃、一旦、落ち着いた気持ちで横になったが、座っている際と、横になった際の揺れはまた違う感じだ。揺れが大きく感じられた。このままでは眠れないのだ。隣には大型テレビからNHKニュースがずっと流れていた。ニュースは殆ど津波それから、都内でも電車が運転見合わせになり帰宅する人々が歩いて帰る様子など、東日本が大変なことだと放送していた。
23時頃、隣の東南アジアから来た人々が声をかけてきた。これから、弁当を配るのでとりに行かないかとのことだった。このターミナルには大予想1万人はいるはずなのに弁当は4千個ほど用意されているみたいだ。取りに行くのを諦めた。暫くしたら、隣の人々が我らの分まで取って来た。ありがたいことだった。しかし、食べる気はなかった。

엄청난 츠나미,

18시30분경,  입국장에 설치된 TV모니터에 눈이 갔다.  뉴스에서는 엄청난 츠나미의 영상이 나오고 있었다. 전화도 불통이였고, 뉴스도 그 어떤 정보도 얻지 못한 상태에서 처음 보게된 뉴스였다. 센다이 공항이 츠나미로 잠겨가는 모습이며, 그 모든것들을 집어 삼키는 해일의 위력을 모두들 넋을 잃고 보고 있었다.  지진피해보다 해일의 피해가 더 클듯 싶었다. 
19시경,  특별히 할수 있는것도 해야 할것도 없었다.  마침 옆에는 나와 비슷해 보이는 또래의 외국인 남자가 있어서 나는 말을 걸었다. 그는 홍콩사람으로 출장을 마치고 돌아가는 길이라고 한다. 일본어는 기본 인사정도만  하였기에 나는 그에게 도움도 될겸 그와  자연스레 함께 행동하기로 했다.  이런 상황을 처음 겪는 상황에서 혼자보다는 둘이 나을것 같은 생각이 든건 그도 마찬가지 였던거 같다.  나는 그의 비행스케줄등 자세한 내용을 알아봐주었다. 그를 실을 비행기가 홍콩에서 안도착했던거 같다.  내일 활주로가 열리면 운행이 가능할지 모른다는 이야길 전해 들었다.

공항의 노숙자가 되어.

20시경, 아무리 봐도 오늘밤 여기를 벗어나는것은 무리였다. 공항으로 들어오는길, 나가는길이 모두 통제된 상황이고 활주로는 폐쇄된 상황이라 고립 그 자체였다.  경찰들이 바깥에서 개인 침낭을 나눠주고 있었다. 나는 그를 데리고 함께 침낭을 받아들고 방금 안전확인을 마친듯한 3층으로 이동을 하기로 했다. 
20시30분경,  잠자리가 될만한 곳을 확보했다. 모든 상점들이 셔터를 내린 상황이라 그 앞에 자리를 잡았다. 콘센트가 있는 기둥은 벌써 사람들로 가득찼다.  아까 받은 비스켓 이외에 식량이 없는 상황이라 우리는 각자 식량을 구하러 나섰다. 지하로 내려가니 키오스크에는 먹을만한것은 야채밖에 남지 않았다.  맥주가 마시고 싶었지만, 구할수 없었고 그래도 캔사워를 구할수 있었다. 
21시경,  각자 구해온 식량을 풀어놓았다. 그리고 조촐하게 나마 사워도 한잔 하려는데  여진이 계속된다. 상점 셔터의 흔들림이 심리적으로 더 불안하게 만들었다.  이럴때 술이라도 없으면 정말 견디기 힘들겠다 싶었다.  그때 사진들을 찾을수가 없는게  너무 아쉽다.  3층 출국장 바닥은 완전 난민센터 같은 분위기 였고,  그렇게 사람들은 하나둘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22시경,  잠을 청하려 누웠지만,  모든게 불안전한 상황이라 그런지 잠은 쉽게 청할수 없었다.  홀 중앙에 있는 대형 TV에서는 계속해서 해일관련 뉴스가 나오고 그 장면들이 리플레이처럼 돌아가고 있었다. 정말 막막하다는 표현이 맞는듯 싶다.  도쿄에 있었더라도 아마 걸어서 집에 가야 할것 같았다. 도심도 모든 교통수단이 멈춰선 상황이라 모두들 패닉그 자체였다. 어쩌면 여기 이렇게 감금된 상황이 더 낳을수 있다는 생각을 하며  위안을 삼았다. 
23시경, 옆에 있던 동남아시아에서 온듯한 무리가 갑자기 분주해졌다.  지금 도시락이 도착해서 나눠준다고 한다. 그래도 어찌 어찌 도시락이 준비되었나 보다. 그런데 준비된 물량이 4천개 정도라고 한다. 얼핏봐도 여긴 만명은 넘을듯한 사람들이 있는데, 턱없이 부족한 도시락은 그렇게 금새 동이 났다. 그런데  옆 친구들이 우리것 까지 확보를 해주었다.  정말 식량의 귀중함을 느끼는 순간이였다. 식욕이 없기에 일단 넣어두고 다시 참을 청해 보았다.

3月12日(土)朝8時頃、寝るか寝てないか内に時間は流れてきた。殆ど寝てないまま、朝がきた。トイレでは歯を磨く人、顔を洗う人でいっぱいだった。
3月12日朝9時頃、条件つきの空港再開案内放送が流れた。先ず、彼の便を確認したが、彼はまだ、出発見込みが立ってないようだ。幸いなのか、私の便は折り返し便が昨日着いたので、整備次第出発出来そうな案内をもらった。
3月12日10時頃、チャイナエアー(CI)係り員は出発対象の人々をチェックインカウンターまで来る案内をした。そこから、搭乗する最終確認を行った。中には日本人が半分だった。彼らは搭乗をやめる人が多かった。別の搭乗券を貰ってなかった。どうせ、今朝出発予定の客も一人もいなかったので、タイムスリップしたようにCI101便はそのまま、時間遅れで出発する見込みだった。
3月12日12時頃、やっと、出国ドア側の扉が開けた。サインボードには別途表記もなく、普段開けていた出国ゾーンの扉も閉じられていた。チャイナエアー台北行きの人のみ出ることが出来た。後ろに香港からの彼に手を振りながら私もその列に入り、やっと20時間ぶりに出国が出来た。

다시 새날이 밝았다.

3월12일(토) 아침8시경,  간밤의 여진속에서 뒤척이며 새벽이 밝아왔다.  거의 잠들지 못한 밤이였다. 화장실에는 사람들로 붐빈다.  정말 난민피난소 같은 분위기다. 나리타공항이 이렇게 바뀔수도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한편 재밋는 경험이다라는 생각도 해본다. 
3월12일 아침9시경,  지난밤 특별히 추가된 피해는 없는듯 싶었다. 그리고 공항안내가 흘러나온다. 활주로를 오늘 개방한다는 내용이다.  그 친구는 출발대상이 아직 아닌듯 했으나, 내가 타고갈 비행기는 이미 탑승구에서 대기중인 상태였으므로 탑승이 가능하게 되었다. 
3월12일 10시경, 차이나에어 관계자로 부터 안내였다. 안내 카운터로 모여달라는 내용이다.  마지막으로 출발 인원을 확인하는 상태였다. 승객들은 반정도가 일본인이였다. 그리고, 타이페이로 가는 비행편 보다는 하와이로 출발하는 이용자가 많았다. 하와이편은  공항에 도착을 못해서 계속 연착 상태였으나, CI101편은 마지막 확인후 출국이 가능하다는 내용이였다.  101이용객중 대부분의 일본인들은 탑승을 포기하는 상태였다. 
3월12일 12시경,  드디어 굳게 닫쳐있던 출국장 문이 열렸다. 101편 이용자들만 일단 출국대상인듯 일일이 티켓을 확인하며 출국장으로 내보내 주었다. 보딩티켓은 어제 그대로다. 3월11일 16시30분발.  아쉽게도 홍콩에서 온 친구와 작별시간이다. 그의 무사귀환을 빌며 그렇게 출국장으로 이동했다. 

3月12日12時半頃、イミグレーションを出たら、普段人々に溢れた廊下とお店は人の様子は見えなかった。幸い、搭乗口前にはうどんの店がオープンしていた。早速、店に入り軽く食事をした。何時間ぶりの暖かい食事だったのか、ちょっとホットした。食べる際も少し、余震は続いた。搭乗を急いた。機内はカラカラだった。帰国する台湾の人しかいない様子だった。
3月12日13時頃、飛行機が滑走路から離陸する瞬間、戦場から脱出する気持だった。そらから、成田周辺、それから、東京の都心が普通の様子で視野に入った。違う町を飛んでいる気分だった。それから、やっと安心したのか、自分も知らずに寝てしまった。
3月12日16時頃、台北桃園空港に無事に着陸した。イミグレーションでは普段と違って”辛苦了”と
挨拶をしながら、赤い封筒を渡した。中には無事帰国を祝いする手紙とゴールド紙に包んだチョコが入っていた。どれほど、世界からもニュースになっていたのかを実感する瞬間だった。その後、入国場を出たら、外には大勢のマスコミ群が取材に来ていた。その後、ホテルについて、暫く、台湾放送局の地震関連ニュースを見た。
それから、暫く、東京へ戻らず、ソウルに移動し、16日東京へ戻った。韓国ソウルでも募金活動をしていた。戻る日の東京の空は灰色でかなり欝な雰囲気だった。

나리타를 떠나며,

3월12일12시반경, 출국장에 도착하니, 너무나 썰렁한 분위기였다.  보통 여행객들로 가득차있을 공간이 텅텅 비어있었다. 마침 상점들은 몇몇 문을 열었다.  우동가게도 문을 열었다. 나는 가게로 달려가 우동한그릇을 뚝딱 비우고 서둘러 기내에 올랐다.  기내의 승무원도 승객도 모두들 어제의 악몽을 경험한 후라 조용한 분위기였다.  승객들은대부분 타이완 사람들 같았다. 
3월12일 13시경,  드디어 출입문을 닫고 게이트를 벗어난다. 활주로까지 택싱하는동안 부디 땅이 조용하길 바라고 있었다. 다시 여진이 와서 폐쇄되기라도 하면 정말 난감함 그자체 이기에 말이다. 그렇게 무사히 활주로에 정렬하고 바로 이륙하게 되었다.  하늘에서 보이는 풍경들은 그냥 일상의 그런 모습들이였다.  어제 화제가 났다던 치바쪽 가스탱크가 있는 쪽도 조용했다.  마치 전장을 떠나는 분위기였다. 
3월12일 16시경,  기내에서는 편하게 잠을 이룰수 있었다.  긴장이 풀려서 인지 눈을 뜨니 착륙태세로 들어섰고 무사히 타이베이 타오위엔공항에 착륙했다.  출장일정도 그 어떤 것도 할수 없기에 나는 일단 서울로 돌아가기 위해서 다시 티켓팅을 하였으나, 당일편은 연결이 안되었다.  공항이민국에서는 빨간 봉투를 나눠주었다, 그 속에는 금박지에 쌓인 동전 초콜릿이 들어있었다. 무사귀환을 축하하며 주는 듯 했다.  그리고 입국장을 벗어나자 엄청난 취재진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아마도 지진후 첫 귀국편이라 더 더욱 매스컴의 관심은 큰듯했다.  

다시 서울로, 

일단 시내 호텔로 이동한뒤 나는 다음날 서울로 가는 비행편에 올랐다.  호텔 침대에 누었을때 마치 등이 흔들리는 착각이 들었다. 이게 트라우마 라는것일까,  TV에서는 계속해서 지진관련뉴스가 나오고,  정작 일본을 떠나왔는데도 불구하고 몸과 정신적 충격은 쉽게 가라앉지 않는것 같았다.   나는 서울서 대기하다가 회사와 연락이 되서 16일 다시 도쿄로 향했다.  

地元の新聞記事、震災地から無事帰国した人々が赤い封筒を持って手を振っている。


2016年3月今現在、
韓国のテレビ局が放送した、今の福島に関して取材したドキュメンタリー番組を見た。番組では
現在、原子力発電所の様子とその周りの被害状況を主にリポートしていた。放送によると、発電所半径20Kmにある、人と動物の放射能による被害が大変だということを伝えていた。
その中には、牛を放牧している人の被害の例や、放射能の被害が続くのに政府からは安全だと、問題ないだとすることに反発している様子が出た。放射能がそれほど間単に消えてしまう物質ではことは常識なはずなのに、それに関する日本政府の判断と行動は違うことも知らせた。
その中で、現在、福島市に増えている放射能廃棄処理物が町あっちこっちに散らばれている様子。その中、駅前などに設置している放射能数値が分るデジタル案内物が実際測量と違う表記になっているのがショックだった。デジタル案内塔の直ぐ近く10メトルもしない土で測った結果は安全な数値より何倍も危険な結果がでたが、真実は隠されていた。
一々例ををあげる必要もなく、今現在震災地では被害が続いているのが事実だが、日本のマスコミそれから、政府の対応はそれに答えていないようだ。
東京オリンピックなど大きな世界の人々が集まる行事を準備している中で、危険な要素を正しく伝えて行動するべきだと思うのだ。今、世界はZikaウィルスのことで騒いでいるんだ。ブラジルは今年夏季オリンピックに向けて万端の準備をすると発表しているんだ。それにしても多くの国では参加を慎重に考えているのだが、しかし、放射能に関する被害などそれに関する改善に関してはもう既に状況を改善したと安部は先日UNの演説で話した。
日本政府、現在安部政権のこのような、真実を隠す行動はこれ一つではないと思うのだ。決して、特定の国、人に関して中傷をするつもりはないのだ。正しいことを認識し、それに対する改善策を立っていくのが現状やるべきではないかと思うのだ。何時か、その隠したことは必ず誰かには被害になって戻るはずなので、本当に世界平和を願うのであれば、次の世代に安全且つ幸せな環境を渡していくべきだと思う。

2016년3월 지금 현재, 

지난주 JTBC방송에서 방영한, 후쿠시마에 관한 다큐를 보았다.  방송에서는 현재 파괴된 원전주위와 그에 따른 주변의 방사능 피해 실태를 보고하고 있었다.  방송에 의하면 아직도 20Km반경에는 사람과 동물이 피해가 심하다고 전했다. 그리고, 직접적인 동물의 피해에도 불구하고, 일본정부측은 안전하다, 문제없다는 반응에 반발하는 어느 농부의 모습과 그리고 후쿠시마시에서 방사능 폐기물로 인해 점점 약화되어가는 백혈구때문에 건강을 잃고 있는 어느 주부의 힘든 모습이 나왔다.  
 그리고 더욱 충격인것은  후쿠시마 전철역앞에 세워진 방사능 계측기의 내용이였다. 바로옆 10m정도의 땅위에서 측정한결과 그 숫자가 상이한것과, 결과치가 위험수치에 몇배나 달하는 그런 상황임에도 정부관계자는 그저 안전하다고 숫자로 게시하고 있는 상황이였다. 
 일본의 공영방송인 NHK는 요즘 피해각 지역을 돌아보며, 다시 부활하는 모습들을 취재하여 5년을 맞는 동일본지진후의 모습을 방영하고 있다. 하지만  방사능에 대한 부분은 한마디도 언급이 없다.  직접피해를 본 당사자들은 말한다. 왜 방사능 문제가 해결되었다고 하는가 라다.  체르노빌이 그러하였고, 방사능피해가 그렇게 쉽게 해결된다는게 상식적으로 힘든 상황임을 누구 보다도 잘 알고 있을 정부이기에  안타까울 따름이다.  
 일본정부가 진실을 감추고 있는게 어디 이뿐만이겠는가 만은,  어디까지나 현재 진행형에 있는 이러한 큰 문제속에서 해결보다는 감추기 급급하고 침묵하기에 일관하고 있는 모습이 너무 지나친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아베는 말한다. 평화가 어쩌고 저쩌고....  이건 또다른 테러의 시작이라고 생각한다.  2020 도쿄 올림픽을 앞두고 이런 환경적인 부분을 해결못한채, 눈속임으로 관광객을 유치한다면 그 여파는 안봐도 알것이다.   
 아직도 끝나지 않은 그 날의 아픔들을 치유하고 다시 재건할수 있는건 현실을 직시하고, 진실을 알리고 그것을 인정하는것에서 출발한다고 생각한다.  


当時営業を中止したTokyo Disney Landの模様 、町は憂鬱な灰色で暗い





羽田空港の様子



Thursday, March 10, 2016

# 내 이름을 중국어로 뭐라고 하지? ( 한,중,일의 차별명칭)


중국어로 자기소개,

 요즘 TV에서는 중국관련 오락 프로그램을 많이 진행하고 있다. 그중에 보통 연예인들이라면 중국어로 인사와 간단한 자기소개정도는 그냥 상식이 되어버린듯 싶다. 큰 시장 중국에서 사업기회를 노리는 사람들은 이제 연예인들에게도 일반적인 상황이 되어 버린듯 싶다.  한편, 그들의 자기 이름 소개장면에서 보면 본인들의 이름을 열심히 중국식 발음으로 소개하는 모습을보곤 한다.  런닝맨으로 한참 주가가 오른 김종국을 예로 들어보자,  我是金钟国(워 쓰 진쫑구어, Wo Shi Jin Zhong guo)라고 자기 이름을 소개한다.  과연 그의 이름은 김종국일까 진쫑구어일까,  의문을 던지지 않을수 없다. 인기로 먹고사는 연애인들이야 어쩔수 없다지만, 우리 개개인은 그럴 필요가 있을까 의문이다. 

한국,일본,중국 각국에서 불리우는 고유명사의 실태.

예전 80년대 이전까지 한국에서는 중국이 사용하는 한자 표기시, 우리식 독음을 적용한적이 있다. 고유명사인  Beijing(北京)을  북경으로,  Chengrong(成龙)을 성룡으로 불렀으며,  아울러 일본의 경우, Toyotomi Hideyosi (豊臣秀吉)를 풍신수길로 , 그리고 아직도 Tokyo(東京) 도쿄를 동경으로 부르고 있는 책이나 사람들을 볼수가 있다.   

그렇다면, 중국에서 불리우는 우리의 고유명사는 어떠한 실정인가?  얼마전까지 우리의 수도 서울을 그들은  汉城 (Han Cheng) 한청 이라고 표기했으며 최근 우리의 발음에 가까운 표기인 首儿(Shou er) 셔우얼 로 표기 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여전히 우리의 고유명사는 그들의 독음방식대로 읽는경우가 태반이다. 전 김대중 대통령의 경우 (Jin Da Zhong) 찐 따 쫑 으로 불렸다. 또한 앞서 말한 김종국이 그들의 이름대로 불리워진다.  

한편, 일본의 경우는 어떠한가,  일본에서는 10여전부터 한국과 중국의 한자표기 고유명사의 독음에 차별을 두고 있다.  한국의 고유명사는 일본식 독음표기법이 아닌, 한글에 가까운 독음을 가타가나로 표기해, 한글음에 가까운 표기 노력을 하고 있다.  서울(ソウル) 을 소우루So u ru, 로 그리고, 일본에서 겨울연가로 일약 스타덤에 오른 배용준의 경우( ぺ・ヨンジュン) 페욘쥰, 이라고 우리식 음에 가깝게 표기 한다.  아울러  국가 원수같은 경우에는  한자를 병기하여 사용하지만, 옆에 한글식 독음을 가타가나로 표기해 발음법을 보여주고 있다. 
  
그렇다면, 일본인들은 중국인을 어떻게 부르고 있는가  참 아이러니 하게도  중국인에게는 일본식 독음을 그대로 적용한다.  또한, 신기하게도 중국인 자신도 아무 거리낌없이, 일본사람에게 자기 소개를 할때 일본식 독음으로 본인들을 소개한다.  중국의 국가주석 시진핑(习近平)의 경우 習近平(シュウ・キンペイ) 슈 긴페이 라고 소개한다.  심지어는 대륙식 간체표기와, 일본식의 중간체 표기로 글자 모양또한 다르다. 일본과 중국의 뉴스를 보고 있다보면, 양국이 같은 인물을 놓고 부르는 방법을 달리하고 있는점이 참 웃길 노릇이다. 
앞서 말했듯이, 우리 나라사람들은  중국인에게는 우리의 이름을 중국식 독음으로 소개하며, 일본에서는 우리식 독음을 고집하고 있는 참 우스운 현상이 일어나고 있는게 현실이다. 

그외의 문제들. 

현재, 한자는 중국본토 이외에도 타이완, 홍콩, 마카오에서 주로 사용하고 있으며,  중국본토에는 56개의 소수민족이 있으며, 그들은 중국어(한어) 이외에 각자의 오리지널 언어를 대부분 가지고 있다.  그중에 조선족이 우리와 직접 관련이 있겠다.  조선족은 국적이 중화인민공화국이다. 즉 중국이며, 그들은 한국인이 중국인에게 자기 소개하는 독음 방식과 반대의 형태를 보여준다.  그들의 이름은 중국식으로만 읽혀질뿐 어디에도 한글로 읽는 방식은 없다. 하지만, 얼마전 희대의 살인극을 펼친 오원춘의 경우를 보자.  실제 이름은 Wu Yuan Chun (吴原春)이다.  그가 먼저 한국에 와서 본인을 우유엔춴 이라고 하지 않고  한국식 독음으로 이름을 소개했을것이다.  조선족의 경우 일본에서는 또다시 그들의 독음에 맞게 이름을 이야기 한다.  오원춘의 경우 고 겐 슌 이라고 본인을 소개했을것이다. 이부분 우리는 외국인 고유명사 표기에 문제점을 드러내고 있는것이다.  조선족이란 예외를 두는것인지 모르지만, 이건 또다른 혼란을 가져올 뿐이다. 굳이 한글독음을 표기하고자 한다면 반드시 중국식 오리지널 이름을 표기해야 할것이다. 

오원춘관련 중국어 페이지. http://baike.baidu.com/view/8378524.htm

한국입장에서 본 중국어의 역사. 

한,중,일,타이완, 홍콩등 동북아 나라는 한자를 생활에서 사용하고 있다. 아울러 한자의 근워또한 중국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글자를 빌어 그 뜻을 사용함에 있어서는 오랜 역사를 거쳐 각 나라별로 글의 형태나 의미는 조금씩 그 나라에 따라 다르게 사용되고 있는게 현실이다. 

나는 20년전 대학에서 중문학을 전공했다. 그리고 한국이 중국과 수교를 맺기전에 우리의 중국어는 타이완의 교육방침을 본받아, 현재의 Pin yin (汉语拼音) 우리식 발음 한어병음이라는 발음기호가 아닌, 注音符号(Zhu Yin Fu Hao) 한글식 독음 주음부호를 사용하였다.  물론 이것을 계기로 많은 변화가 있었으며, 모든 대학의 중문학과 교재는 병음표기법으로 바뀌었다. 교육생 입장에서는 어려운 주음부호보다 알파벳으로 이뤄진 병음의 사용이 더 친근했던 기억이다.  하지만, 아직도 타이완과 중국본토, 아울러 광동어를 사용하는 홍콩( 광동식 표현, 샹강),마카오는 같지만 다른 중국어를 각각 사용하고 있다.  공산당이 정권을 수립한 이후 고민하는 부분중에 하나이다. 

한,중,일 한자 문화권이 고유명사 사용변화,

사업상 여러 나라 사람들과의 교류가 많아서, 늘 그들과 명함을 주고 받는경우가 많다. 나에게 버릇이 있다면, 그들의 명함의 앞뒤를 꼭 확인한다.  요즘 중화권( 본토,타이완,홍콩,마카오)의 친구들의 경우 본인들의 이름이외에 영어식 이름을 가지고 있는경우가 많다.  
물론 한국인도 해외에서 생활을 하거나 이중국적을 가지고 있는 사람의 경우, 샘킴이니 하며 그들의 한글이름보다는 또다른 이름이 불리우고 있다.  

특히, 타이완, 홍콩의 경우. 신기한 경우를 보게 된다.  한국인의 경우, 그들의 닉네임은 내국인용 보다는 외국인과의 교류용이 대부분이라고 생각하지만, 타이완, 홍콩지역의 사람들은 다르다. 이들은 내국인끼리도 본인의 닉네임을 본명이상으로 사용하는것을 보게된다. 
재밋는것은 일본의 경우다.  일본인의 경우 다른 한자 문화권 나라와는 달리 본인을 외국인에게 소개하때는 대부분 퍼스트 네임을 소개하는경우가 많다.  예를들어,  스즈키 토모 라고 한다면, 본인을 토모(Tomo)라고 소개하는경우가 많다. 이는 실제로 몇년전 미국에서 공부할때 같은 클래스의 일본인들이 이러했고,  비즈니스에서 만나는 일본인들은 대부분 이렇게 자신을 소개한다.  

실제로, 일본국내에서 십몇년을 지냈지만, 한번도 성이 아닌 이름을 불러본 기억은 한번도 없다.  이런 일본인의 심정은 또 왜그런것인지 참 아이러니 하고 복잡하다.  
주제와 벗어난 이야기지만,  일본회사 소속에서 영어권 나라와 일을 하다 보면 재밋는 현상을 보곤 한다.  내 상식상,  메일의 첫머리에 남자는 Mr 여자는 MS로 표기하거나 하는게 일반적이라고 생각하지만,  요즘 영어권 특히 미서부 IT쪽 사람들은  다르다.  나는 한국사람이고,  한눈에 봐도 일본인 성도 아닌데 그들은 메일 첫머리에 , **** San 이라고 표기한다.  이건 무슨 코메디 인지 모르겠다.  바로 일본식 호칭인 무슨무슨 상 이라는 표현을 굳이 저렇게 표기하곤 한다. 미국인이 일본인에 대한 예절이라고 생각하는 모양인지 모르지만, 왠지 기분이 썩 좋지는 않다.  
중국어와 일본어는 모음의 수의 제한으로 음표시의 한계가 있는것이 사실이다.  그렇다 보니, 시대의 발전으로 점점더 국경이 없어지고, 특히나 글로벌 브랜드들이 각 국에 진출하면서 언어의 제약적인 이유로 그 형태가 우리가 알던 그것과는 다르게 변한다. 중국의 경우 Mac Donald (麦当劳), Coca Cola (可口可乐)등.  마이 땅 라오,  크어커우 크얼러, 라고 불리우며, 일본의 경우 마끄도 나르도, 코카코라 라고 불리운다. 그들의 언어 표기상 최선의 방식인것이며, 이것이 현실이다. 





글을 맺으며,

10여년전 일본에서 유학을 하던 나는 처음 내이름이 그들에게 그들의 독음대로 읽혀지고 불리워지는것이 너무나 싫었다. 내 성인 장(張)이  일본식 독음 표기인 쵸로 읽혀서 쵸상 이라고 불리웠다.  나는 정말 웃을수 밖에 없어서 그래서, 한자표기 보다는 가타가나를 주로 표시해서 제대로된 발음을 알리었다. 현재 일본정부는 한국인에 한해서 한자와 영문표기중 어떤쪽을 택할지 선택하도록 한다.   

또한, 과거, 처음 중국어를 접하고 열심히 본인 이름을 중국식 독음으로 Zhang으로  소개하던 나는 이제 더이상 나의 이름을 중국인에게 중국식 발음으로 소개하지 않는다.  발음이 어려운 친구에겐 그냥 닉네임을 알려준다.  내이름이 엉뚱하게 불리워지는게 싫기 때문이다. 
한,중,일, 타이완, 홍콩, 마카오중 여권에 한자를 사용하지 않는 나라는 한국뿐이다. 그 말인즉,
여권은 자국이 아닌 타국에서 모국어를 사용하지 않는 외국인들에게 어떻게 불리워져야 하는지를 알파벳으로 표기 해서 알리는 역활을 하는 중요한 신분증의 하나이며, 한번 만든 여권의 알파벳은 추가로 수정할때 엄청난 위험을 감수해야만 한다.  

그렇다. 이야기는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고자 한다.  간단히 말해서 고유명사를 고유명사 그대로 표기 하자는게 나의 주장이다.  특히 사람의 이름은 대부분이 한사람에 한개의  법적이름을 소유할 뿐이다.  우리가 외국인의 이름을 외국인 독음대로 읽고 표기하는게 예의 이듯이, 우리또한 특히 중국인에게 우리의 이름을 소개 할때는 본인의 한글이름, 영문표기로 반드시 이름을 이야기 해야 했으면 하는것이다. 그리고 고유명사를 제외한 표기는 우리의 독음대로 뜻이 전달되면 되지 않을까 하는게 내 생각이다. 

타이완출신의 일본인 배우의 경우, 한글로는 금성무, 한자로 표기는 金城武, 중국에서는 Jin Cheng Wu, 물론, 타이완및 홍콩및 광동어지역에서는 Gam Sing Mou로 불리운다. 그런데 재밋는 사실은 그는 국적은 타이완이였지만 현재는 일본국적을 가지고있다. 아래 사진과 같이 타이완여권에도 여권상의 이름은 그의 아버지성을 따라서 일본식으로 표기하고 있었다.  그가 연예인이기에 그리고, 홍콩과 마카오의 거주권을 가지고 있는 특수한 상황이기에 그의 이름은 사는 지역마다 전혀 다른 이름으로 불리운다. 한자를 사용하는 문화권의 크나큰 오류가 아닐수 없다. 나는 예전부터 그를 카네시로 다케시로 불렀다. 금성무라는 그의 이름의 이런 속내용을 알고 금성무라고 불렀으면 하는 바램이다.



비슷하게 우리나라의 경우, 추성훈이라는 사람이 있다. 그는 일본에 사는 재일동포로 현재는 일본국적을 소지한 일본인이다. 한국 미디어에서 그를 많이 소개하여 아마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가 누구인지 알았을것이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아직도 그를 추성훈이라는 이름으로 불리운다. 그리고 여전히 그의 국적이 일본인지 모르는 사람이 대부분인듯싶다. 그는 국적이 바뀌기 전부터 일본에서 아키야마 라는 이름을 사용했다.  내가 아는 대다수의 많은 재일동포2,3세들은 그들의 한국이름대신 일본식 이름을 만들어 사용한다. 일본사회가 재일동포란 신분을 불리하게 만든다는 피해의식 때문에 생겨난 현상이 아닐까 생각한다. 이와 달리 많은 한국인이 미국으로 건너가, 미국의 시민권(국적취득)을 취득한다. 국적이 무엇인지 다시한번 생각해 본다. 여권의 색이 바뀐다고 그들의 원초적인 태생이 바뀌지 않을텐데 말이다. 카네시로 타케시와 같이 혼성국가의 부모를 가진 이라면 상황은 다르겠지만 말이다. 


*중국여권, 한자와 병음표기

*홍콩여권&신분증, 한자와 광동어발음표기

*한국비자, 외국인용, 알파벳 성명만 표기

*일본여권, 알파벳 이름만 표기

東京羽田国際空港(도쿄하네다 국제공항),  北京首都国际机场(베이징 셔우두 국제공항) 으로 말이다.  대신에 본인의 이름은 영문그대로, 그들에게 전해주거나, 닉네임으로 소개를 해보는게 어떨까 한다. 


우리의 인천국제공항을 중국인에게 런츄안지창이라고 소개할것인가?  그리고 일본인이에게 진센쿠우코 라고 소개할수는 없지 않겠는가....
전세계에 인천공항은 하나밖에 존재 하지 않듯이, 그런 이름을 우리가 제대로 불러주다면 처음 접하는 외국인들은 그 룰을 따를것이다. 






요즘처럼 한글 맞춤법이 사라져가고 기이한 인터넷용어와 국적불명의 줄임말이 난무하는 시대에 우리스스로 우리것을 알지 못하면 우리의 정체성은 사라질것이며 그 미래또한 그리 밝지 않을것 같다. 


Sunday, March 6, 2016

#.리가 여행1, 발틱해 크루즈숙박,バルティック海のクルーズ宿泊 (Stockholm-Riga, Sep,2015)




MS Isabelle Tallink. 

2013년4월 첫 운항을 개시한 이사벨호 Tallink호는 과거 헬싱키-탈린, 구간을 운항하던 배로서,  현재 라트비아의 수도 리가(Riga)와 스웨덴의 수도 스톡홀름을 운항하며, 선체길이는 약 170미터, 약2,500명, 370대정도의 차량을 실을수 있는 대형 크루즈선박이다.  아울러 Viking호는 헬싱키와 스톡홀름을 운항한다.

1. 스톡홀름을 떠나며,
  참으로 맑은 하늘이다. 청정지역이라 그런지 정말로 눈이 아플정도로 파란 하늘이다. 비행하기에도 좋은 날씨지만, 나는 비행기대신, 큰 배를 택하였다. 국경을 배로 넘어 본적은 없다. 흔한 부산에서 대마도 후쿠오카, 아니면, 인천에서 웨이하이도 단 한번 배로 국경을 넘어본적이 없으므로 이번 여행은 새로운 경험이 한가지 추가 되는 셈이다. 조금은 설레이기도 하고, 어떤 모습으로 나를 반길지 궁금하기도 하다. 
  배는 오후5시 출발이다, 나는 비행기출발과 비슷하게 2시간전에 터미널에 도착했다. 스톡홀름에서는 여러군데 항구에서인근 다른 나라로 출발한다. 내가 도착한 터미널은 라트비아 리가와 러시아의 상트페테르브르크를 운항하는 터미널 같다. . 



  일찍 도착한탓인지, 대기자가 별로 없어 보인다. 표는 인터넷으로 미리 구매하였기에, 여권만 제시한다. 카드형태의 승차권에는 방번호, 그리고 인터넷 접속키 등 정보가 인쇄되어있다. 터미널은 따로 구경할만한 시설이 없었기에, 나는 바로 탑승출구로 향한다. 
  탑승출구에서는 출입국직원대신, 총을 휴대한 남여 경찰이 검문을 한다. 쉥겐조약(Schengen Agreement) 덕분에 여권에 출국도장은 생략한다. 참고로 쉥겐조약은 1985년6월14일 룩셈부르크셍겐마을 근처 배위에서 조약했다고 해서 쉥겐조약이란다. 이조약으로 유럽연합국의 통행제한을 없앴고, 현재는 26개국이 참여하고 있단다. 아래 파란색부분이 조약국가이다. 국경을 넘는다기 보다 그냥 같은나라의 인근 지역을 여행하는 느낌이다.

Image :Wikipedia
   
여권검사를 마치자 긴 복도가 이어진다. 얼핏봐도 100m는 넘는 탑승구 통로다. 긴 탑승구 옆으로 두둥, 오늘나를 싣고갈 MS Isabella 호가 보인다. 운항회사는 Tallink라는 회사이다. 한눈에 넓디 넓은 브릿지가 보인다. 뱃머리를 보면 타이타닉의 장면이 떠오른다. ㅎㅎ





 출입구에서도 경찰로 보이는 사람이 지키고 있지만, 따로 여권 체크는 하지 않는다. 나는 배안을 살펴본다. 총 11층으로 이뤄져있고 내가 묵을객실은 9층이다. 엘레베이터를 이용해서 나는 9층으로 이동한다. 헬싱키로 이동하는 크루즈보다는 작다고 하는데 이정도만 해도 정말 규모가 대단한듯 싶다. 
9층에 내려서 미로 처럼 생긴 객실 복도를따라 내 방을 찾아간다. 또 이때 영화 타이타닉이 생각나는지 나도 잘 모르겠다. 촘촘히 붙은 객실은 창이 있는 쪽은 가격이 좀 더 비싸고, 창이 없는 쪽은 기본 가격이다. 물론 나는 창없는 기본 방을 예약했다. 베드가 상단 하단, 2개 있는 방이다. 혼자 사용하는데 별 문제없는 사이즈다. 객실에는 화장실 샤워시설까지 있어 필요한 부분은 모두 갖추고있다.  작은 선반겸 테이블에는 선내방송을 들을수 있는 빌트인 라디오같은 방송장치가 있고, 창문이 없어 막힌듯한 느낌이나. 이것도 좋은 경험이다 생각하며 짐을 풀었다. 자, 그럼 이제 본격적으로 이사벨호의 탐색에 나설차례다.






2. 이사벨 아가씨 흩어보기.
   캐빈이 있는 9층에서는 중앙 계단을 이용해서 아래층 위층으로 이동이 가능하다. 먼저 갑판위로 올라간후 한층 한층 내려가 보기로 했다. 10층에는 디스코 바가 있다. 노래방박스도있고, 한켠에 바도 있고, 왠지 해가지면 떠들석해질것 같은 분위기다. 긴밤 음주가무는 필수인듯 ㅎ
갑판위에 올라서니 하늘이 너무도 파랗다, 물도 파랗고, 왠지 청정,클린,그린, 신선등 왠갖 깨끗한 인상과 단어가 마구마구 떠오른다. 시야를 돌아보니, 위쪽에도 또다른 항구가 보인다. 저곳에서는 핀란드 헬싱키로 출발할 크루즈가 출항을 준비중이다. 이사벨 보다 10분먼저 출항한다고 한다. 그 뒤를 이사벨이 졸졸 따라가는 형태인듯 하다.




 그리고 매 층을 다니다 보니, 유난히 술광고가 많이 보인다. 역시 추운곳에 사는 사람들은 술을 좋아하나 보다. 생각해보면, 스웨덴에서는 그리 술들을 많이 마시는걸 못봤는데, 이미 출발도 전에 간이 판매대를 설치하고 바카디 같은 보드카를 판매하고 있는걸 보면 긴여행의 지루함과 북유럽특유의 기후때문이 아닐까 싶다. 




한층 내려가니 레스토랑이 있다. 배가 출발한뒤에 영업을 시작하는듯 보인다. 레스토랑은 뷔페식으로 먹을수 있는곳과 정찬을 즐길수 있는 공간으로 나눠진다. 참고로 인터넷 예약시, 아침이나 저녁식사예약도 함께 할수 있다. 하지만, 현장을 살펴본결과, 반드시 예약하지 않아도 이것저것 맘에 드는 식사를 현장에서 사먹을수 있을듯 싶다. 





한층 아래로 내려가니, 수퍼마켓이라고 써져있는 상점이 보인다. 아마도 면세점기능을 하는 가게인듯 하다. 물론 여기도 배가 출발한뒤 영업을 시작하는것 같다. 한층 더 아래로 내려가니, 사우나 시설이 있다. 크루즈에서 즐기는 사우나는 어떨까 싶어 내부를 살펴보니, 규모는 생각보다 크지않았고 큰 자쿠지하나만 있고, 작은 사우나가 하나 있는것 같다. 날씨가 더 추웠더라면 체험해볼만 한듯싶다. 그리고 다시 한층을 올라오니, 아이들의 놀이터와 각종오락기기가 있고 조금 더가면 정면데크가 보이는 넓은 홀이 나온다. 




 중앙계단 기둥을 살펴보니, 와이파이 마크가 있다. 객실에서는 연결이 안되지만, 공용구간에서는 와이파이가 작동된다. 아까 받은 승선표에 접속키가 있다. 속도는 그럭저럭 음성통화정도 할 속도는 나왔다. 하지만, 유튜브같은 동영상사이트는 접속이 안되는듯하다. 왜냐면 그리 많지 않은 용량을 주기 때문이다. 그래도 이게 어디인가, 예상치도 못한 선물을 받은 느낌이다. ㅎㅎ



3. 출항 (17시정각)
  객실에 돌아와 침대를 펴고 스톡홀름에서 준비해온 오늘저녁과 내일 아침용 일용할 양식을 정리했다. 와인에,맥주에,시나몬롤,머핀까지 푸짐하다. ㅎ 특히 뽀얀계란은 스톡홀름숙소에서 직접 삶아서 왔다.  
 출항한다는 방송이 나온다. 방송은 영어,라트비아어,러시아어,스웨덴어로 나온듯 싶다. 배고 고프지 않아 다시 카메라를 들고 갑판으로 이동했다. 배에 승선하고 나서 부터 왠지 스톡홀름에서 느꼈던 조용함과 편안함은 아주 조금 사라진 분위기를 느꼈다. 
  대부분의 승객은 라트비아에서 온 승객인듯 보였고, 그런데 그들은 하나같이 러시아인의 분위기가 느껴졌다. 무뚝뚝한 분위기, 대부분의 남녀승객이 흡연을 즐긴다. 갑판으로 올라가는 별도 한쪽은 흡연실이 없어서 완전 너구리굴이다. 켁켁.   라트비아와 러시아의 관계에 관하여 궁금증이 생겼다. 오늘밤 시간도 많겠다 역사공부좀 해야겠다. 


 ↑ 헬싱키로 출발하는 페리 선착장, 출발 준비중인 SILJA LINE 
↑ 방금 출발한 헬싱키로 향하는 SILJA LINE, 윗사진부분에서 10분먼저 출발한다. 우리배는 저녀석의 뒤꽁무니를 쫒듯 항해할것이다. 배에는 핀란드의 트롤가족 Muumi(무민)캐릭터가 그려져있다.

 우리배도 미끄러지듯이 항구를 벗어난다. 주차장으로 따지면 앞뒤꽉막힌 주차 상태인데, 어떻게 옆으로 이동이 가능한지 참 신기할 따름이다. 그렇게 이사벨호는 무민의 꽁무니를 쫒기시작한다. 
발틱해는 정말이지 호수같다. 오늘만 그런건지 모르지만, 파도가 없다. 이게 바다가 맞는건지, 잔잔해도 너무 잔잔하다. 오직, 배가 물살을 가르는 소리만이 들릴뿐이다. 
 저 멀리, 둥근원 모형의 Ericsson Globe Arena 가 보이며, Gamla stan의 높은 성당들의 첨답들도 희미하게 실루엣으로 보있다. 이제 스톡홀름을 떠나는구나...  주위 섬들은 하나같이 숲으로 울창하며, 그 숲안에는 주거 공간이 있고, 그리고 사람들이 생활하는 모습들이 보인다. 어떤 사람들이 생활하고 있을까, 은퇴한 사람들이 살고 있는걸까? 무슨 일을 하면서 살고 있을까? 하는 궁금증이 자연스레 유발된다. 
 배안에는 스톡홀름에서 주말을 보내고 돌아가는듯한 라트비아인들, 그리고 아마도 주류쇼핑을 떠나는한 몇안되어 보이는 스웨디시들, 그리고 중국에서 온듯한 소단위의 단체 여행객들이 오늘 이배의 주인공들이다.

 ↑ 멀리 지평선에 보이는 올드타운의 교회 첨탑들

 ↑ 저 둥근원은 아마도 Ericsson Globe Arena가 아닌가 싶다. 

헬싱키에서 출발한 갤럭시 호가 마지막 스팟을 하는 중이다. 그리 속도감이 없어 보였는데, 옆으로 금방 지나쳐 버린다. 그리고 앞서 달리는 무민은 커브를 크게 돌고, 헬싱키에서 출발한 핀란드국적의 또다른 회사인 바이킹Line의 Amorella호와 교차한다. 이렇게 덩치 큰 배들이 큰 물결없이 수면위를 미끄러지듯 운항하는 장면이 참 신기할 따름이다. 







점점 배는 바다의 중심으로 나간다. 섬들도 멀어져간다. 재미있게 생긴 노란 배에는 차들로 가득차 있다. 아마도 섬과섬을 연결해주는 다리 역활을 하는 배같다. 그도 그럴것이 이렇게 섬들은 많고 각각의 섬에서 생활들을 하니 이런 배들이 반드시 필요할듯 싶다. 


앞서 가던 무민호도 뱃머리를 헬싱키로 항로를 돌려 시야에서 사라졌다. 이제 남은건 우리 이사벨호 뿐이다. 해는 넘어가고, 그 넘어간 자리에 붉은 흔적을 남긴채, 매직아워의 시간이 다가온다. 발틱해의 작은 섬들을 바라보는 한 커플을 담아봤다. 왠지 여행하고 있다는 실감을 주는 장면이다. 


매직아워로 짙푸르게 변한 발틱해에 고요히 달이 떠올랐다. 추석이 얼마 안남아서 인지 밝기도 크기도 눈에 띈다. 배는 완전히 스웨덴의 다도해를 완전히 빠져나온듯 싶다. 그저 고요함과 적막이 흐른는 밤이 시작될것 같다.


2부에 계속